리차드 톰슨 - I want to see the bright lights tonight. 음악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 대한 평 중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매우 선한 사람같다" 정확하지 않지만 평론가 이동진의 글이었던 것 같다. 영화나 음악을 접하다 보면 이렇게 창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려질 때가 있다. 나는 영국 포크 싱어 리차드 톰슨의 음악을 접할 때 그리 된다. 리차드 톰슨은 유머러스하고 선한 사람 같다. 그리고 형식이나 권위 같은 것에는 관심 없는 소박한 인물 같다. 90년대 초반 리차드 톰슨의 솔로 앨범 [Rumor and Sigh]롤 들었을 때 그렇게 느꼈고 그의 대표작 [I want to see the bright lights tonight]를 통해 이런 느낌은 완전히 굳어졌다. 

 [I want to see the bright lights tonight]운 리차드 톰슨이 페어포트 컨벤션 활동을 그만 둔 후 74년에 발표한 음반이다. 부인 린다 톰슨과 함께 작업한 이 앨범은 롤링스톤지 선정 100대 음반에 들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유력지 선정 100대 앨범에 들 정도면 음악적위대함과 창조성이 마구 스며나오는 앨범이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앨범에는 힘을 쏙 뺀 소박함과 따스함이 가득하다. 

 이 앨범의 첫곡 [When I get to the border]와  4번 곡 [I want to see the bright lights tonight]에서는 기름기라고는 없는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 1번 곡을 들을 때는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부부가 거실에 누워서 흥얼 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밥도 먹었겠디 나갈 일도 없고 누군가 찾아 올 것 같지도 않은, 편안함이 몸에 착 달라붙어 무료하기 까지 한 시간에 부부가 흥얼 흥얼 거리는 느낌이 난다. 앨범의 타이틀곡 [I want to see the bright lights tonight] 을 들때는 린다 톰슨의 무심한 창법에 매료된다. 별 다른 기교 없이 마음가는 대로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는다. 무덤덤 하지만 감칠맛이 있는 린다 톰슨의 노래는 너무 차갑지 않은 평양 냉면을 먹을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 두 곡도 좋지만 내게 이 앨범의 백미는 3번 [Withered and died]다, 사라진 꿈에 대에 이야기 하는 이 곡에는 린다 톰슨의 따뜻한 목소리가 주는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위에 언급한 3곡 외에 이 앨범에는 들어볼 만한 곡들이 많다. 그런데 모든 곡을 관통하는 감정은 소박함과 따뜻함이다. 그래서인지 날이 추워질 때나 일상이 힘겨울 때 자주 듣게 되는데 들을 때마다 위로를 받는, 내겐 참 소중한 앨범이다.  


[I want to see the bright lights tonight] https://www.youtube.com/watch?v=57PENuNVapc 



박주민 별종의 기원 읽은 것들 정리

 작년 총선 전 인터넷을 떠돌다 인상 깊은 기사를 읽었다. 은평구 선거전에 인형들이 나와 한 국회의원의 유세를 돕는데 그 인형을 쓴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슬픙과 박근혜 정부의 냉대에 속이 썩어버렸을 그 분들이 활짝 웃는 탈을 쓰고 한 국회의원의 선거를 돕는다니. 그것도 춤까지 춰 가면서. 도대체 어떤 후보이길래 유가족들이 이리 열정을 쏟을까 싶었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이런 지원을 받는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따듯한 가슴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인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박주민 의원. 세면도구가 담긴 백팩을 들고 다니며 약자의 권리를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는 의원, 그래서 거지 갑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박주민 의원이었다. 



그 기사를 읽은 후 여러 매체를 통해 그의 활동을 보며 우리에게 또 한명의 좋은 정치인이 생겼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가 '별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구입하여 읽어 보았다. 박주민 의원과의 인터뷰가 수록된 이 책에는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가 가진 신념이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혔던 부분은 그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서 말하고 그 신념의 관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서술된 곳 이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자리 잡히기 위해 몇가지 노력을 해왔다. 우선 그는 변호사 시절부터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가 집회 시위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유는 우리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성장이 4.19나 6월 항쟁, 가까이는 촛불혁명과 같은 집회,시위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박주민은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선거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역구에 너무나도 많은 의원 수가 할당 된 현재의 선거 제도는 소수의 권력이 다수로 변질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그는 연동형 정당 비례 대표제 도입을 통해 이런 모순을 시정하고자 노력 중이다. 또 내년 개헌을 앞두고 개헌 논의에 시민이 배제된 현실을 지적하며 남아공, 아일랜드 처럼 개헌 논의에 시민 기구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박주민은 따뜻한 가슴뿐만 아니라 방향이 잘 잡힌 이성을 갖춘 좋은 정치인이란 점을 새삼 확인했다. 정치에 관심이 있고 또 우리 사회에 좋은  정치인의 성장을 바라는 사람은 후원 차원에서라도 이 책을 구매해서 읽어 보기를 권한다. 


 

7년의 밤, 28 - 정유정 읽은 것들 정리

 '히말라야 환상 등반기'와 '내 심장을 쏴라'로 날 매혹시킨 작가 정유정. 작가 정유정이 위 두 책을 통해 보여준 매력에 이끌린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후작 '7년의 밤'과 '28'을 읽었다. 그런데..각각 하루만에 다 봤던 [히말라야~, 내 심장을~]와 달리 [7년의 밤, 28]은 읽는데 수일씩 걸렸다. 정말 재미 없어서. 정유정의 책에 끌린 이유는 다름 아닌 재미 였는데 그 재미를 두 작품을 통해 통 느끼지 못했다. 

 이 두 소설은 내게 왜 그리 재미가 없었을까?  그 답은 지나칠 정도로 치밀한 서사에 있다. 두 작품 모두 글의 장점으로 '압도적인 서사'를 든다. ('7년의 밤' 뒷편 광고글 : '뒤돌아보지 않는 힘 있는 문장, 압도적인 서사 , 생생한 리얼리티'   '28' 뒷편 광고글 : 치밀하고 압도적인 서사, 숨 쉴 틈 없이 달려가는 문장,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  그런데 이 두 소설에서의 '압도적'인 서사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 무엇보다 묘사가 지나치게 정교하다. 인물이 등장 하는 공간 하나 하나를 지나치게 자세히 묘사하니 독자로서는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 할 여지가 없다. 그러니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의 지휘에 끌려가는 노예가 된 기분마저 들어 읽기가 점점 괴로워졌다. 글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인 '마음대로 상상하기'가 이 두 책에서는 차단된다. 
   
 또 사건 하나 하나의 연관성이 너무 나도 촘촘한 것도 문제였다. 소설이란 어찌보면 허구 같고 어찌보면 현실 같아야 한다. 즉, 소설이란 허구와 현실 사이에 절묘하게 걸쳐 있어야 한다고 믿는데 이 소설은 그 것에 실패했다. 저자가 소설에 지나치게 철저한 인과 관계를 부여하다 보니 소설 속 세계는 현실과 영 거리가 멀어져버려 그러했다. 인과 관계는 우리가 현실을 해석할 때 이용하는 많은 법칙들 중 하나일 뿐이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법칙이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가 겪는 사건, 사고들 중 정말 많은 것들은 정확한 인과관계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상의 수많은 음모론은 이러한 이유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마치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복선을 깔고 그 복선을 현실화 시키기 바쁘다. 이래서 소설 속 각 사건이 나름의 이유를 가지는데는 성공했으나 이 때문에 각 사건들의 리얼리티는 오히려 퇴색되어 이 또한 읽기 불편했다.  

 이러한 이유로 '7년의 밤'과 '28'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소설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작가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독자를 강제로 몰아 세우려 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열린 결말 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독자의 개입이 어느 정도는 가능한 서사가 아쉬웠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그로인해 저자와 독자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서사가 아쉬웠다.       



    

정유정 - 내 심장을 쏴라 읽은 것들 정리

 나는 최근의 베스트셀러에는 큰 관심이 없다. 최근에 인기를 끄는 책 보다는 고전을 읽는 것에 흥미를 더 느낀다. 하지만 고전 읽기가 지루해지면 최근 인기작을 기웃거리는데 이 과정을 통해 정유정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읽은 정유정의 첫 작품은 '히말라야 환상 등반기' . 동네 도서관에서는 정유정의 인기작인 '28'이나 '7년의 밤'은 빌릴 수가 없어 이 책을 빌렸는데 읽는 내내 작가의 재치에 사로잡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야 자연스레 이 작가의 다른 책에도 관심을 가져 일단 '내 심장을 쏴라'를 손에 쥐었다.  

 이 책은 정신 병동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니 주인공은 당연히 정신병자이다. 그것도 억울하게 병원에 수용 된. 억울하게 수용된 정신병자는 보나마나 탈출을 꿈끌 것이며 이 책의 주인공도 그러할 것이다 싶었다. 이 때문에 줄거리가 너무 통속적일 것 같다 싶어 읽는 초반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은 재벌 2세인데 유산 상속 과정에서의 음모로 병동에 수감된다. 이 역시 너무 통속적이라 이 책 중반, 약 160p까지 "끌까지 읽어 말어"라는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접한 심사평(이 책은 제 5회 세계 문학상 수상작이다. 상금이 무려 1억인)중에 초반 전개가 밋밋하다는 단점을 지적한 것이 있는데 정말 그러했다.  

 하지만 글 후반을 읽을 때 쯤 그런 갈등은 싹 사라지고 글에 완전히 몰두하게 되었다, 작가의 치밀한 구성, 군더더기 없는 힘있는 문체등이 어우러져 글이 마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나는 그 것에 포획되어 글을 읽는 속도를 점점 올릴 수 밖에 없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에 비례해서 작가가 그리는 세상속으로 더더욱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소설 읽기를 마친 순간 오랜만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싶어 작가에 대해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읽은 얼마 되지 않는 소설들 중에서 '내 심장을 쏴라'는 읽는 재미라는 면에서는 어떠한 다른 작품들에도 뒤지지 않는다. '내 심장을 쏴라'는 현대 소설이 놓치고 있는 '이야기'의 본질, 재미를 극대화 했다는 점에서 칭송 받을만한 작품이다. 
 

 

Amusing ourselves to Death - 죽도록 즐기기 읽은 것들 정리

1. The Medium is the Metaphor.

 

- chapter는 우리가 멀마나 쾌락에 매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긴 위한 fact.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사람에게 웃음을 주는 능력이 매우 중시되는 세계에 살고있다. 그 예로 현대 정치인들에게는웅변술, 리더쉽등 전통적인 능력이 아닌 매력적인 외모, 유머러스한 말솜씨 등등 대중에게 피상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즉 우리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즐거움, 쾌락이 무엇보다 중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 저자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를 예로 든다 저자는 시민 혁명이 일어나던 시대에는 보스턴이, 인종간의 교류가 늘어나는 시대에는 뉴욕이, 그리고 산업이 부흥하던 시대에는 시카가고 각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 시대이며 그 것을 대표하는 도시는 무엇인가? 저자는 현대가 환락의 시대이며 그 것을 대표하는 도시는 라스베가스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우선 Media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현대인의 특징 중 하나는 미디어에 대한 심각한 의존이기 때문에.

현대인은 미디어를 통해 거의 모든 정보를 접한다. 그런데 이 '미디어'라는 장치는 어떤 현상을 우리에게 전달할 때 실체를 그대로 보여 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TV 는 무엇보다 image에 의존한 정보전달을 할 수 밖에 없고 또 문맥이 단절된 부분적인 사실만을 전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에 미디어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는데 미디어가 어떻게,얼마나 우리의 사고에 개입하는지를 평가하려면 미디어가 탄생하기 이전 우리는 어떤 매개체를 통해 정보를 얻어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현대식 미디어가 탄생하기 이전 우리는 인쇄술의 시대(the age of typography)에 살았으며 그 이전에는 언어의 시대(the age of language oral)를 살았다. 인쇄술과 언어, 즉 정보 전달의 매개체가 우리 인식에 끼치는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Mumford의 저서 'Technique and Civilization'을 인용하는데 이 책에서 저자 mumford'시계는 초 와 분을 생산하는 기계(the clock is a piece of power machinery whose product is seconds and minutes)'라 규정한다. Mumford는 자연에서 초와 분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나 시계가 개발됨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초, 분등의 개념을 통해 파악하며 이 것들은 자연을 왜곡한 인위적인 개념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왜곡, 그리고 활자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왜곡이 분명히 존재함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정보 전달의 매개체는 현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왜곡을 피할 수 없는 은유(metaphor)라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2. Media as Epistemology

 

이 장에서 저자는 활자 시대의 담론과 T.V시대의 담론은 얼마나 다른가?를 그리고 T.V 의 영향으로 인해 현재의 담론은 얼마나 주름지고 이상해 졌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위해 일단 인식론에 춧점을 맞추는데 이 것은 단순히 T.V는 미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쓰레기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탈피, T.V가 어떻게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가를 논의하기 위해서이다.

 

미디어는 미디어에의해 전달되는 문맥, 현상들을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끌고가는 힘이 있다. 그 사례로 저자는 각 시대의 진리 판단 기준을 드는데 우선 활자가 없던 언어의 시대에서 진리의 판단 기준은 잠언, 속담 그리고 뛰어난 수사학 구사 여부에 존재했다. 한 예로 그리스인들은 진실이 적합한 표현의 틀(수사학)을 갖추지 않으면 그 것은 진실로 받아들여 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활자의 시대에 와서 위와 같은 진리의 기준은 모두 무시 되는데 이 것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판단 기준의 발전이라 볼 수도 있지만 상대론적 입장에 서 있는 저자는 진실이란 시대적 편견임을 보여주는 사례, 미디어에 의해 진실이 왜곡될 수 있는 사례로 본다. 즉 저자가 보기에 미디어는 우리의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 저자의 기본적 인식 - 글쓴이는 여기에서 이 글을 이끄는 자신의 기본적 인식 3가지를 밝힌다.

1) 미디어의 변화는 발전이 아니다 : 저자는 언어의 시대에서 활자의 시대로, 다시 활자의 시대가 T.V의 시대로 변해가는 과정을

발전으로 볼 수 없다고 본다. -> 왜 그런지에 대한 논변은 이 장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다.

2) 시대를 대표하는 미디어가 바뀌어도 옛 미디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활자시대에도 언어가 살아남듯이.

3) T.V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public communication과 주변 환경만을 오염시킨다. ->베트남전 반전 여론, 인종차별 철폐에 T.V가 큰 역할을 했듯이 T.V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T.V 시대가 도래하면서 활자 시대의 덕목이었던 진지함, 료성 그리고 대중적 담론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3. the Typographic America

 

이 장에서는 활자 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던 18C/19C 미국의 사례가 다뤄진다. 활자 문화가 힘을 넓혀 가던 당시의 미국은 지금의 연예인들 만큼이나 작가들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미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lecture에 참가해 지적인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가 보기에 이것은 활자 문화의 번성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4. The typographic mind

 

저자는 17~18C이 미국은 활자 문화의 시대였고 이때문에 해당 시기의 미국인은 이성적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활자의 주된 역할이 의미 전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활자로 이루어진 담론은 일단 content - laden 하며 (불완전한) 글을 읽기 위해서는 독자는 serious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활자 문화의 번성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보다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는데 17~18c 미국이 바로 이러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증거로 엄청나게 길며, 문어체를 기반으로 한 링컨과 더글라스의 연설, 당시 전도사들의 이성을 기반으로 한 설교, 그리고 광고를 든다.

 

5. the peek-a-boo world

 

이 장에서 저자는 활자를 통한 인식과 대비되는 사진을 통한 인식의 특징을 다룬다. 19C 중반, telegram이 등장하면서 미국의 media 산업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19C 이전에는 뉴스의 전파 속도가 인간이 이동하는 속도와 동일했다. 하지만 telegram의 등장은 뉴스의 전파 속도를 급격하게 높였는데 이는 엉뚱한 결과-불필요한 뉴스의 범람-를 낳았다.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일들이 신속하게 전파되면서 사람들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고 점점 선정적인 뉴스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일조를 한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활자와 달리 '문맥'을 전달하지 못하며 추상화가 불가능하고 명제가 되지 못한다. 활자가 아니라 사진을 인식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사진이 보여주는 현상만을 즉각적으로 받아 들일 뿐 그 사진이 찍힌 전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 사진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인식을 위한 언어가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은 context와 무관한 pseudo event를 바탕으로 현실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현상을 정점으로 이끈 것이 TV인데 이 이후의 글(part II)에서는 TV를 통한 인식이 얼마나 해로운가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Part II

 

6. The age of show business

 

저자는 모든 미디어에는 고유한 bias가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TV도 고유한 bias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entertainment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 증거로 1983년에 벌어진 the day after(핵전쟁의 심각성을 알리는 프로그램) 방영 이후의 TV 토론(debate)을 든다. 이 토론은 유흥을 유발하는 요소가 배제된, 심각한 형식을 띈 debate 였으나 서로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없는 일방적인 연설이라는 점, 게다가 패널들이 주제와 상관없는 언사를 늘어놓는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 토론을 TVbias(진지함은 배격되고 즐거움, 유흥이 부각되는)가 잘 드러나는 사례로 꼽는다. 그리고 교육이나 설교에도 entertainment 요소가 중시되는 현상을 TV가 강력한 힘을 가지면서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끼친 사례로 제시한다.

 

7. Now...This

 

Now..this 는 일종의 접속사 역할을 하는 용어임에도 아무것도 연결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시키는(seperate everything from everything)용어다. 이 용어는 현대의 TV와 라디오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저자는 이런 현상은TV 뉴스의 파편화로 인한 것이라 주장한다. Now..This에 의존한 담론은 뉴스의 파편화 뿐만 아니라 맥락, 결과, 가치가 배제된 뉴스, 그래서 진지함이란 찾아볼 수 없는 뉴스 따라서 완전한 오락거리로서의 뉴스를 불러왔다. 이제 뉴스는 멋진 용모를 가진 진행자 그리고 화려한 음악과 함께 진행되고 거의 45초안에 하나의 주제가 처리된다. 이렇게 파편화, 오락화된 뉴스를 접하는 시청자는 자신의 사고를 마비시킨 채 뉴스를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데 저자는 이런 사회에서 우리의 문화권이 지속될 수 있을지 우려를 표한다,

 

 

8. shuffle off to Bethlehem 9. reach out and elect someone 10. Teaching as an amusing activity

 

8,9,10 장에서 저자는 종교, 정치 그리고 교육이 TV의 영향을 받아 엔터테인먼트화 되었다고 주장한다. 진지한 설교 대신에 음악을 이용한 설교, 진지하게 정책을 토의하기 보다는 청중을 웃기려 드는 정치인들 그리고 세서미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재미위주의 교육 프로그램을 예로 들면서 이제 우리는 재미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문화 속에 살게 되었으며 이 것은 TV때문이라 주장한다.

 

 

11. The Huxleyan Warning

우리의 문화가 쇠퇴해간다면 그 종착지는 둘 중의 하나다. 하나는 조지 오웰이 예견한 전제 정치의 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헉슬리가 예견한 시대, 문화가 희화화 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많은 철학자, 정치학자들이 전제 정치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 문화가 전제 정치에 의해 쇠퇴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문화가 희화화 되는 현상에 대한 경고는 충분하지 않아 이미 우리의 문화는 희화화 되었고 앞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질 것 같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미디어를 통한 경고, 두 번째 교육을 통한 경고를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저자는 둘 다 효용성이 없을 것이라는, 그래서 우리 문화는 희화화라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 책 마지막 문장에 저자의 비관적인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Huxley was trying to tell us that what afflicted the people in Brave New World was not that they were laughing instead of thinking, but they dd not know what they were laughing about aand why they had stopped thingking"

 

 

 


그레이트 오션 워크 - 1. 떠나기 여행

 재수생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인 나는 수능이 끝나면 일을 접고 약 한달 반동안 (11월 중순부터 12월 말까지)여행을 간다. 그래서 매년 어디로 떠날까라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올해는 별 고민없이 뉴질랜드에 가보기로 했다. 작년 라오스 여행을 할 때 우연히 여행 교사 한분을 만났는데 그분과 여행에 관한 대화를 하던 중 앞으로 테마를 잡고 여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고 난 그 테마를 Trekking으로 잡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 출발점을 뉴질랜드 Milford sound trekking으로 정했고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 '세계 10대 트레일 걷기 여행'(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2217978)이란 책을 통해 호주의 Great Ocean Walk에 대해 알게되었다. 7일 동안 10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다는 점이 도전 의식을 고취시켰고, 호주의 자연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라 한번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난 한번도 트레킹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점, 그래서 장거리 트레킹을 그것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게다가 숙박을 캠핑장에서 텐트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난 평생 텐트에서 자본 적이 없다. 그러니 텐트 칠 줄도 모른다)이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그러다 쉼표가 있는 일상(http://corn225.blog.me/100204784385)이란 블로그를 보며 묘한 자신감이 들었다. 아니 여자도 하는데 남자인 내가 왜 못할까라는 생각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하고 뉴질랜드만 가기로 했던 일정을 수정, 호주도 일정에 집어 넣었다.

 

 일단 호주로 가기로 했으니 비행편을 잡아야 하는데 직항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경유편을 이용할 것이냐를 먼저 결정해야 했다. 직항으로 가게되면 한번에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장거리 비행은 질색인지라 경유편을 이용하기로 하고 최저가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제주항공(인천-태국 36만원), 말레이지아 항공(태국-멜버른 60만원) 조합으로 항공권을 구매했다. 말레이지아 항공을 택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마침(?) 추락& 실종 사고로 항공권 값이 똥값이 되어 그랬다. 저 가격으로 이코노미석 중 제일 상석을 택할 수 있어 편안한 비행을 할 수 있었고.

 

 그 다음은 텐트, 대형 배낭, 캠핑용 장비등을 구매해야 했는데 모두 최저가로 구매했다. 텐트와 배낭은 영국 vango 제품을 각각 10만원대 초반으로 구매했고 버너, 코펠도 okmall을 통해 제일 싼 것으로 구매 했는데 아무 문제 없었다. 그리고 등산용 신발도 국산 중저가 브랜드인 칸투칸에서 중등산화를 구매했는데 이 것 역시 아무 문제 없었다. 즉 장비는 모두 최저가에 가까운 것으로 구매했지만 그 것때문에 속썩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왼쪽 푸른색 백팩이 반고 가방이고 가방 상단에 삐쭉 나온 것이 반고 1인용 텐트

 


 트레킹동안 내 주식이 되었던 우리 비빔밥그리고 다 합쳐 4만원 정도 들인 버너와 코펠


 이렇게 장비들을 구입한 후 해야 할 것은 호주 비자 신청하기와 캠핑 사이트 예약하기. 호주를 무비자 국가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사전 비자를 신청해야 해서 여행 2주전쯤인 11월 초에 신청했다. 비자 신청 사이트는 (https://www.eta.immi.gov.au/ETA/etas.jsp?tub=&submit=apply) 이고 캠핑 사이트 예약 사이트는 (http://www.parkstay.vic.gov.au/great-ocean-walk)이다. 캠핑 사이트 예약시 차량 번호를 입력하는 칸이 있는데 차량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아무 번호나 넣어도 무방하다. 비자 신청 및 캠핑 사이트 예약을 하면 몇일 후 확인 메일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준비 하면 1차 준비는 끝~!~! 이런 메일을 받은 후부터는 세부적인 준비를 해야한다.

 

 캠핑 사이트 예약 후 받은 메일에는 준비 목록이 자세히 적혀있는데 이 목록대로 철저히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등산 스틱(walking pole)을 꼭 준비하라고 나와 있는데 GOW는 오르막이 많아 등산 스틱이 필수다. 특히 6일째날은 오르막길이 한 6번 정도 나오는데 이 때 등산 스틱이 없으면 정말 고생한다. 그리고 물집 방지용 패드도 준비하라고 나오는데 난 패드 대신 좋은 양말을 사서 물집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옷은 기능성 옷으로 상의 2, 하의는 한벌이면 충분했는데 날씨 변화가 심해 방수자켓, 판쵸, 배낭용 레인 커버 또한 꼭 필요했다. 속옷은 빨 곳이 없으니 하루당 상/하의 한벌씩 필요했고.

 


브덴브로크가의 사람들 -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자들의 불행. 읽은 것들 정리

 브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18C 독일 시민사회를 살았던 한 가족에 관한 기록이다. 이 소설에서는 제목처럼 브덴브로크가 가족의 서서한 몰락이 묘사되는데 극중 주인공들은 부유한 상인 계급에 속한 자들로 가문의 영광을 중시하고 그 성공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하지만 브덴브로크가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조상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며 서서히 무너져 내려가다 결국에는 가문의 존재마저 말살시키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개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중 흥미로운 자들은 주인공 격인 브덴브로크 시의원, 그의 여동생인 (페르마네더 부인), 그리고 시의원의 아들(하노)다.  시의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빈틈없는 상인으로 묘사된다. 단정한 외모, 직업적 성공을 위해 항상 노력하는 성실성, 게다가 가문의 지위 상승을 위한 정치적 야심의 추구 등이 이 시의원의 외형을 묘사 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원은 내면이나 외연 모두 철저한 상인이었던 선대의 인물들과는 다르게 내적 갈등으로 인해 우울한 삶을 산다. 소설 중반부에는 시의원의 겉모습 묘사를 통해 그의 내면이 들추어지는 구절이 있다 "혼자 있을 때의 그의 얼굴은 아까와는 전혀 딴판으로 변해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 때는 의지의 명령에 순종하느라 끊임없이 긴장하고 있던 입과 뺨의 근육이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었다. 오랜동안 인위적으로 붙잡아 매두고 있던 주도면밀하고 친절하고 힘찬 표정에서 가면이 벗겨져 버리기라도 한 듯 피로에 지쳐 괴로워 하는 얼굴이 드러났다....자신을 속이려는 시도를 할 용기가 없는 그의 머리를 무겁고 혼란스럽게 가득 채우고 있는 갖가지 생각들 중에서 그는 오직 한 가지의 절망적인 생각만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흔둘이 된 토마스 부덴브로크가 기진맥진해 녹초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주어진 삶과 내면이 추구하는 삶이 심각하게 어긋나버린 인물의 종말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시의원은 중년기를 벗어나 노년기에 접어들던 어느 날 심각한 치통으로 그의 일생 처음으로 공적인 임무를 중단한 채 병원에 가나 의사의 실수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치통 치료를 위해 이를 뽑다 치근이 파괴되자 그는 근본적인 치료를 미룬 채 집으로 향하다 길거리에서 쓰러지고야 마는 것이다. 왜 시의원은 이 소설에서 치통으로 삶을 마감할까? 치통이 원인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과연 얼마나될까? 토마스 브덴브로크가 돌발적이며 비참하게 죽게 된 원인은 치통이 아니라 평소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삶을 영위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이 명하는데로 살지 못한채 항상 위장해야 하는 삶, 외부의 시선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가문의 의지에 따라 생을 꾸려나가야한다는 압박감은 그를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충분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시의원의 여동생 페르마네더부인, 시의원의 유일한 자손인 하노 역시  어찌보면 시의원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인다. 페르마네더부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문의 명예 유지를 위해 결혼을 하며 그 결혼은 곧 파국을 맞이한다. 게다라 재혼 역시 실패하며 자신의 딸 또한 결혼을 통해 불행을 맛본다. 그리고 시의원의 아들인 하노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그는 예술적인 감각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 하나 집안 전통에 따라 강건한 상인으로 크기 원하는 아버지의 명을 이기지 못해 불행한 학창시절을 보내다 결국 장티푸스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브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작가가 살던 시대의 시민정신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성공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거세하고 내면의 명령, 내 존재의 명령이 아니라 외부의 명령, 타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삶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살아야하는 의미를 찾고 그 과정을 통해 기쁨을 맛보는 삶이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 목숨의 연명과 최소한의 체면 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제껴둔채 노동에 빠져들어야 하는 우리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점차 점차 절망으로 빠져 들게된다는 점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것은내가 내면의 길을 쫓아 내 생을 꾸려갈 방법을 통 찾을 수도 없다는 데서 나온 절망이다. 후반 하노의 심리를 표현하는 대목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치욕과 동경어린 절망감에 얼마나 깊이 내동이치는가,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용기와 우용성을 얼마나 갉아먹는가를 그는 다시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는 산처럼 짓누르는 엄청안 절망감에 압도당했다." 피곤에 절어 망가져가는 육체와 세속화 될대로 되어버린 정신을 가진 나, 아름다움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는 나는 여전히 하지만 때때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이 소설의 표현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는 나는 여전히 갈등만 할 뿐 내 삶을 어떻게 운영해 나가야할 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나에게 남은 것은 위 인물들과 같은 몰락, 처참한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을 소설을 읽으며 지워버릴 수 없었다.   

Glenn Gould - Golden variations 음악

글렌 굴드는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생동안 자신을 고립시킨 채 살았다완벽한 예술을 위해 굴드는 스스로 고독을 선택했으니 그에게 고립/고독이 그리 괴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에게라도 고립그로 인한 세상의 이상한 시선 등으로 괴로웠던 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물론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 하지만 혼자 있다고 꼭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벗 삼고 있다반면 내가 혼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나 자신이 내게 결핍 되어 있을 때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누가다름 아닌 '나 자신'일때 이런 상태는 고립이다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상대방이 거기내안에 있다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고독에 대한 굴드의 위와 같은 생각에서 핵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벗 삼는다고 말한 구절이다그런데 자신이 스스로에게 기댈 수 있다면 고독이란 존재 하지 않는다는참으로 빛나는 말 뒤에 뒤따라 나오는 고립에 대한 정의가 흥미롭다그가 상대방의 존재가 내 안에 있는 상태를 고립이라 말한다는 것은 그 역시 타인의 존재가 자신의 내면으로 침투해 온 적이 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느꼈다는 증거로 보인다.


 글렌굴드의 골든베르그 변주곡에서 뚜렷이 느껴지는 감정은 외로움이다이 연주 도입부의 섬세한 터치에는 외로움이 물씬 풍겨난다외롭다고 느낄 때 그래서 괴로울 때천천히 그러나 명료히 건반을 눌러가는 모습이 선명히 연상되는 이 곡의 초반을 듣다보면 이 위대한 연주자 역시 외로움으로 고통을 느꼈을 것이란 사실에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면서 음악에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곡이 위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한 곡 안에서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그에 대한 극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다소 느린 템포로 시작하는 초반부를 지나면 글렌 굴드의 엄청난 기교를 느낄 수 있는 연주가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불완전한 존재를 넘어 천상으로 향하려는 굴드의 의지를 뚜렷이 느낄 수 있다기교와 말 그대로 타건이라 해야 할불굴의 힘이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룬 연주를 들으면 한계를 넘어 이상을 향해가는 굴드의 정신에 온 몸이 마비되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그리고 그 것을 극복해야겠다는 의지 사이에서 방황하는 요즈음의 내게 굴드의 음악은 너무나 소중하다언젠가 이 곡을 들으며 내면의 성장을 느낄 수 있는 시기가 왔으면 하는데..뜻대로 될지 의문이다.


송곳니 - 독재에 대한 우화 영화

 그리스 영화 송곳니는 독재에 대한 우화다. 이 영화는 아버지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는 한 가족의 모습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묘사하며 이를 통해 통제된 삶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지를 보여준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한명의 아들과 두딸로 구성된 이 가족은 절대 권력을 가진 부모, 특히 아버지에 의해 완벽히 장악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장악에 것이 참으로 묘한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장악한다는 것은 물리적인 학대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영화 속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학대는 커녕 상당한 물질적 풍요를 제공함으로써 통상적인 독재와는 다른 점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풍부한 먹거리와 안락한 쉼터를 제공하며 특히 아들에게는 성적인 쾌락까지 제공 함으로써 어찌보면 피지배자들을 매우 존중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와 쾌락은 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진정 두 딸과 아들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자녀들에게 제공되는 안락함은 그들의 안녕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제공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안락'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 이 안락은 인간성의 말살을 담보로 한 위장된 모습일 뿐이다.          



          아들의 성교를 위해 직접 여성을 데려와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 혹시 모를 
          아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대한의 안락을 제공한다.
          위 화면을 보면 아들과 상대녀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러한 장면이 송곳니에서는 매우
          흔하다. 이것은 아마도 독재자에 의해 인격과 개성이 말살된 존재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싶다. 



  피상적이던 어떻든 가족들간에 평화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부모들의 개념 조작에 있다. 부모들은 모든 개념들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며 자식들에게 주입함으로써 그 자식들을 무지한 존재, 순종적인 존재로 만든다. 우연히 집안으로 들어온 고양이를 온 집안을 위협하는 괴물로 보이게끔 만드는 장면이 그 좋은 예인데 이 것은 독재에 의해 조종받는 인간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가에 대한 좋은 유비로 보인다.   

         외부의 적, 고양이를 쫓기 위해 짖어대는 가족들의 모습. 내부의 반란을 막기 위해 외부의 위협을 
         동원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전략이다. 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진 피지배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처참하고 우스운지.. 


 그런데 아무리 통제로 자식들을 길들이려 해도 그들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극 중 부부는 자식들에게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송곳니가 빠져야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늙어 호호 할머니/할아버지가 되기전에는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송곳니. 이런 송곳니가 빠질 때만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강변은 자식들의 자유의지를 꺽어 영원히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두 부부의 욕망이 극명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 두 부부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자식들에 대한 영원한 통제를 추구하지만 큰딸(도통 극중 이름을 알 수 없다)은 자신의 송곳니를 스스로 깨뜨림으로써 탈출을 시도한다.  


         아령으로 자신의 송곳니를 깨뜨리는 모습.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듯이 우리가 우리들의 자유를 찾고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극심한 
         고통을 감내할 줄도 알아야 할것이다.  



 1986년 시민 봉기를 통해 우리나라에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도입된 후 우리나라에서 독재의 망령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정권에 반대하는 조금의 의견에도 바로 칼을 빼드는 요즈음의 권력을 보면서 독재정권의 재출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집권당에서는 요즈음의 정치 상황을 예전 독재 정권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 하지만 '추세'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현재의 정치적 분위기는 분명 문제가 있다. 송곳니는 모든 판단의 기준이 한사람에게 집중된 독재 권력의 문제점을 은밀히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에게 각성을 요구한다. 이명박 정권하의 우리들은 꼭 한번 봐야 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아저씨 보면서 불편했던 점. 영화

 아저씨는 보는 동안 지루함을 잘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꽤나 잘 만들어진 상업 영화다. 하지만 아쉬운 점들이 몇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극중 깡패 형제 중 동생으로 나오는 종석의 존재다. 
 
       요넘이 종석. - 유사 싸이코 짓을 하는 사진을 찾을 수가 없어 네이버에 있는 인물 사진을 올린다.

 요즘 범죄를 다룬 영화에는 사이코 혹은 정신분열증 환자로 보이는 인물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런 경향은 영화 '레옹'에서 게리 올드만의 호연 이후 매우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레옹에서 맛이 간 형사 스탠필드로 나온 게리 올드만은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악인 캐릭터를 창조해 냄으로써 보는 이에게 신선함을 안겨줬다. 이 역할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탓인지 레옹 이후 범죄 영화에는 영화와의 통일성과는 상관없는, 매너리즘에 푹 빠진 무능력, 3류,  저질 사이코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보는 나를 정신 분열증의 문턱으로 몰고간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아저씨의 종석역을 보는 순간 '또야..'라는 생각과 함께 피곤함이 엄습했다. 종석이 등장하여 미친'척'하는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내 머리속에는 '이제 그만!!'이라는 외침이 메아리 쳤던 것이다.  


  예술에서 꼭 피해야 할 것 중 하나가 구태의연한 모방이다. 안그래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지리함에 지친 우리들에게 영화 마저 반복을 강요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일인가? 이제 제발 게리 올드만을 추종하는 데 시간을 쓰는 연출자&배우들은 대오각성하여 새로운 캐릭터 창출에 힘쓰기 바란다. 

    레옹를 찍는 순간에도 new character를 만들어낸 Gary Oldman 형님. 위대하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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